윤봉길의사 후손 윤주빈 한고은 선을 넘는 녀석들

윤봉길의사 후손 윤주빈 한고은 선을 넘는 녀석들

 

■ 선을 넘는 녀석들 상해 윤봉길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창호 선생과 신규식 선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당시 중국어를 잘해 중국인으로 오해받기도 했다네요.  

1911년, 상해로 망명한 신규식 선생은 중화민국을 세운 민주주의 혁명 신해혁명를 보게 됩니다. 신해혁명 주역 쑨원과 교류해 박은식 대동단결 선언을 발표했어요.  독립운동에 큰 기폭제로  일본 도쿄 2·8 독립선언입니다.  이로 인해 3·1 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생기게 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찾았지만 수많은 관광객으로 입장이 제한되었어요. 윤봉길 의사의 종손인 배우 윤주빈도 함께 했어요. 윤주빈은 큰할아버지가 바로 윤봉길 의사라고 했어요. 

 


한고은 신랑이 종씨라고 가문의 자랑이라고 했다네요. 호가 예관인 이유가 나라가 망하고 너무 화가 나서 자살하려고 음독 자결을 시도했지만 후유증으로 한쪽 눈을 잃었고 나라가 망했는데 어찌 세상을 바로 보겠냐고 했고 하며 마지막 순간에도 불식, 불약, 부언을 했고 식사와 약을 끊고 입까지 다문 것이 마지막 순간이었다고 합니다. 신규식 선생은 43세로 사망했습니다.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결성했고 이봉창 의사는 일본인 행색에 의심을 받았지만 한국인으로 정체성을 깨닫고 독립운동을 하려고 찾아 왔고 의거를 하지만 실패하고  채소 장사를 하던 윤봉길 의사가 독립운동 의지를 고백해 한인애국단에 가입했습니다.  윤주빈은 윤봉길 의사는 정이 많고 동생들의 공부도 엄격하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윤봉길 의사는 12세 나이에 일본 사람이 되라는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 선언하고 자퇴를 하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습니다.  장부출가생불환 글을 남기고 어머니에게는  우리 청년 시대에는 더 한 층 강의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고 나라와 겨레에 비치는 뜨거운 사랑이고 나는 우로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 길을 택하였다는 편지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김구와 윤봉길이 마지막으로 만났던 원창리 13호를 방문했습니다.  평범한 가정집으로 변했고 거사 장소였던 훙커우 공원은 윤봉길이 아들들에게 남겼던 유언 시와 당당했던 심문 기록이 남아 있었어요. 

윤봉길 기념관에서 윤봉길 의사 시신을 사람들이 밟고 지나도록 윤봉길 시신을 쓰레기통에 방치했다고 합니다. 박열이 수습하러 갔을 때 할아버지도 함께 가셨다고 합니다. 

 

윤봉길 의사가 자결용 도시락 폭탄을 사용하지 못하고 폭탄이 터지자마자 제압이 됐다고 합니다. 의거에 성공했지만 엄청난 구타를 맞고 제압된 후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윤봉길의사가 말하길 "현재 우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반항해 독립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러나 만약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면 우리는 독립하게 될 것이다. 독립에는 당장 효과가 없음을 잘 알고 있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나의 의거에 의해서 조선인들이 깨어나고 각성하는 것이며 전 세계에 우리 조선이 일본과 다름을 명명백백히 하기 위해서 전범들을 처단하였다"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 윤주빈 프로필

 

나이 89년생 30세

 

고향 서울

 

소속사 싸이더스 HQ

 

학력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윤주빈 드라마

 

신의 퀴즈3, 더 케이 2, 미스 함무라비 윤주빈 영화

 

열정같은 소리 하고 있네

 

윤주빈 연극

 

겨울이야기

 

윤주빈 예능

 

다시 걷는 독립대장정, 백 년 만의 귀향 집으로, 복면가왕, 역사저널 그날, 요즘 책방 책 읽어드립니다. 선을 넘는 녀석들 - 리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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