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여권론 운동가이자 여성 최초 서양화가 나혜석
- 정보모아
- 2018. 11. 11. 21:47
나혜석
1896년 4월 28일에 태어나 수원에서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다.
수원삼일여학교에 다니던 시절 소를 몰고 가는 농부의 모습을 스케치 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오빠는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묻자 죽을 때까지 그리는 일과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 나기정은 대한제국 시기 경기도 관찰부 재판주사를 지내고 일제 식민 통치기에는 용인 군수를 지냈다.
나혜석은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로 근대적인 여성 해방운동의 상징적 인물이고 문학가이다.
일본에 유학중인 오빠의 주선으로 일본 도쿄에 있는 사립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하고 여자 유학생 학우회 기관지 여자계 발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에 맞서 학비를 보내주지 않자 휴학하고 1년간 보통학교 교사로 돈을 모아 다음해 복학했다.
단편소설 경희는 1918년에 발표했다. 구후 사립여자미술학교 졸업을 한다.
1918년 귀국해 1919 3.1운동에 여성들의 참여를 조직하는 활동을 하다 5개월 옥에 갇힌다.. 1921년 개인전시회가 열린다.
약혼자 시인 최승구가 병사로 죽자 변호사인 김우영과 결혼해 만주 안종 부영사가 된 남편을 따라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만삭의 몸으로 개인전람회를 열고 에세이 모된 감상기를 발표하고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이후 출품 입상 입선을 한다.
제 5회 조선미술전람회 천후궁으로 특선한다.
1927년 나혜석은 파리에서 그림공부를 하고 남편은 영국에서 법학공부를 하다 파리에서 최린을 만나 남편과 이혼을 한다.
제 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정원이 입선, 12회 제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한다.
1933년 여자미술학사를 열었지만 실패하고 건강이 악화된다.
1934년 이혼고백장을 발표하고 논란이 되고 경제적으로 힘들어져 최린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낸다.
1935년 에세이 신생활에 들면서과 서울 소품전을 하지만 외면당한다.
1938년 마지막에세이 해인사의 풍광을 쓰고 수덕사 견성암과 수덕여관에서 1943년까지 그림을 그린다.
이혼과 천도교 대표 최린 스캔들로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혼녀라는 것이 그녀를 반기지 않은 이유였다.
1948년 서울의 행려병자 무료 병동에서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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